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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editor

올림픽과 스포츠에 담긴 영적 영향력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2일


이 글은 영국의 기독교세계관 전문매거진 빅피처 2번째 호에 기고된 ‘THE OLYMPIC GAMES AND THE SPIRITUAL POWER OF SPORTS’를 잡지출판처인 KLC의 허락을 받아, 읽기 편하게 번역한 내용입니다. 저자 BJ Buys는 전 하키선수였고,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하키코치로 활동하고 있으며, 모두가 아무런 비판 없이 매달려 보게 되는 올림픽중계 속에 드려진 영적 그림자를 분별해 볼 수 있는 좋은 도전을 기대합니다. 편저자주 (위의 사진은 1958년 멜본올림픽 경기사진)

 

2021년 7월 23일,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빠르고, 강인하고, 건강한 최고의 선수들이 32번째 하계올림픽에 경쟁하기 위해 모인다. 전 세계는 엄청난 순간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단련된 육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우아함, 경기를 통해 경험할 감동의 눈물, 거칠고 열정적이면서도 광기에 가까운 함성.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선수들의 용기와 강인함, 이들의 뛰어난 운동신경과 다양한 기술, 엄청난 집중력과 피나는 노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근대 올림픽을 창시했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 (Pierre de Coubertine)은 고대 올림픽을 부활시키며 올림픽의 공식 모토를 이렇게 제안한다.

Citius, Altius, Fortius!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

탁월한 운동신경을 가진 올림픽대표 선수들은 조국에 승리를 안기기 위해, 고통의 한계를 뛰어 넘는 피나는 노력으로 훈련된 사람들이다. 이들을 지도하는 감독이나, 곁에서 응원하는 이들도 협박에 가까울 정도의 열정으로 응원하며, 선수들의 이름을 외친다. 그런데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붇는 이들을 보며,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왜? 저 선수들은 저렇게까지 경쟁을 하는 걸가? 왜 저렇게 희생하는걸까? 무엇을 위해서? 올림픽을 위해 4년동안 매일 7시간씩 뼈를 깎는 훈련 속에 노력을 기울이고, 온 몸을 혹사시키며 자기 전부를 쏟아붓는 헌신의 이유 말이다.


현대 문화인류학자들은 스포츠는 인류 번식을 위한 활동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반면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스포츠는 종교 같은 인민의 아편이자, 부르주아계급의 배를 불리기 위해 시작된 허울 좋은 행사, 무지한 프롤레타리아를 종속 시키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모두 어느 정도의 일리는 있지만, 조금만 더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모두 틀린 주장들이다. 결승전에 패배했다고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는 선수도 없고, 스포츠계의 이권 문제가 심각하긴 하지만 선수들은 단지 돈 때문에 올림픽에서 경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스포츠를 참여해 경쟁하는 이유는 단지 운동이나 돈을 위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스포츠에는 그 보다 더 깊고 강력한 뭔가 가 있다. 성경은 이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스포츠의 역할과 힘은 철저하게 영적이며 오로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 (12:2)가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78편 2절에서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라는 고백 속에서,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실 메시아(그리스도)를 전한다. 실제로 다윗의 고백 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전까지 인간이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였던 놀라운 지식을 나타내셨다.

우리도 간략하게 나마 현대 세계에서 스포츠의 참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림픽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 갈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운동선수들과 시민들은 현대인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현대 서구사회는 외부 압력 또는 힘에서 벗어나 개인이 자기 삶의 뜻과 목적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최고 가치로 삼지만, 고대 그리스도의의 사람들은 삶 가운데 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자체가 달랐다. 그들의 삶의 목적을 인도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죽음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죽음이라는 현실, 그 미지와 혼란의 세계는 고대의 정신을 사로잡았었다. 죽음의 본질, 더 나아가 이 무서운 현실을 넘어설 방법에 대해 더 집착했다. 사실 스포츠의 목적과 기능은 이 죽음의 그림자와 무덤가 사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스포츠 경기에도 올림픽처럼, 자연이 담고 있는 영적 기운을 숭배하는 종교 의식의 요소와 상징들을 담고 있었었다. 이 의식은 질서정연한 삶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혼돈을 찬양하는 행사였고, 여러 상징 속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를 경험하며 얻는 영적 에너지의 공급처였다. 이러한 스포츠 경기와 같이 치뤄지는 의식과 축제들은, 지금의 올림픽 중계 처럼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재충전하는 데 필수적인 자리가 되었다. 실제로 영어 단어 sport 의 근원은 고대 영어 단어 disport (멋대로 하다)인데, 이 또한 고대 프랑스어 desporte (레크리에이션, 재미/오락, 취미 등의 뜻) 으로부터 파생 되었다. 여기 des는 ‘밑으로 또는 멀어지는’이란 의미의 라틴어이며 porte는 ‘나르다’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원어적 의미를 그대로 살린다면 “심각함에서 내려오다” 라는 뜻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스포츠 경기(의식)의 목적은 경쟁, 게임, 엔터테인먼트가 다가 아니었다. 고대 세계관으로 나온 개념으로서, 오웬 바필드는 이들의 ‘의식의 본질은 자연현상의 저편에, 그리고 나의 저편에, 나와 같은 본질의 영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식의 목적은 개인이 집단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 그리고 이를 통해 위에서 언급한 영적 임재를 통해 상징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모두와 융화하거나 하나되는 것이었다. 이 영적 능력은 스포츠라는 의식을 통해 “위에서 내려온” 것으로, 대중들에게 힘을 돋우고, 공동체로 하나되어 생동감있게 하고, 뇌세포를 활성화 시키고, 심장박동을 힘차게 몰아간다. 이 영적 힘이야말로 선수들이 경쟁하고, 뼈를 깎고, 몸과 마음을 바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경기중에서는 목숨까지도 바쳐질 정도였다.

다시 말해 스포츠 정신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은 스포츠 정신을 통해 영생을 얻고, 죽음을 넘어서 영원을 살았다.

그럼 이 정신은 무엇인가? 스포츠의 기반, 기초 영적인 뿌리가 무엇이길래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능력을 행사하고, 영향을 끼치고 조종하는가? 답은 승리의 영광이다. 한 헬라 시인이 말했듯이 그들이 네 이름을 말하는 한, 넌 절대 죽지 않는다.”


실제로 헬라의 군인, 운동선수, 시민들은 ‘영광’이라는 신념에 매달려 살았다. 인생은 아가토스, 끊임없이 존재 자체에 대적하고 분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운동선수는 승리를 통해, 그의 가족과 응원했던 동족들과 함께, 영원히 승리자로서 기록되어 계속되는 인류의 기억속에 남는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궁극적인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뒤로하고 트로이 전쟁을 선택함으로 죽음을 향해 나간다. 그에 따르면 “내 명성은 영원할 것이고 내 인생은 지속될 것이니, 이는 죽음의 재앙이 나에게 닿지 못함이니라” 아킬레우스는 이 영광을 위해 찰나의 평온한 삶을 포기한다. 이 용기 있는 행동은 시인들과 신들이 영원히 기억할 만큼 숭고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운동선수들의 영광을 신처럼 떠받드는 의식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승리한 선수는 금과 상아로 된 제우스의 동상 앞에 놓여진 72개의 제단 중 하나 위에서 소를 제물로 바친다. 짐승의 피를 우묵한 잔이나 그릇으로 받는데, 피 흘림은 영광의 영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상징했다. 그리고 피를 담음으로서 신성하게 된 컵 위에는 선수의 이름이 기록되는 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됨을 상징한다.

실제로 하키, 테니스, 축구 외에도 많은 스포츠의 트로피들은 지금까지도, 이들 운동과 더 관계가 깊은 검, 갑옷, 바퀴가 아니라, 컵이나 그릇 또는 접시다. 그릇과 컵은 고대 영광의 역사적 상징이다. 세속적이고 영성을 잃어버린 현대사회가 까먹어 버린 상징 말이다.

당시 선수들은 성화를 들고 뛰고, 제단을 향해 원반과 창을 던지고, 제단 앞에서 레슬링을 하고 복싱을 했다. 승리와 함께 이 영광의 의식에 참여하고,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서 영광과 영생이 온전하게 경험되길 원했을 것이다. 곧 있을 올림픽도 영적인 에너지와 승리를 통해 거머쥐는 영광 (선수들에게 일종의 영생을 가능케 하는)을 기념한다는 점에서 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사람이 만든 의식과, 영생을 향한 사람의 시도를 의심스럽게 본다. 성경에서는 이 ‘영광’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 고대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강력하게 존재하는 잘 알려지지 않고, 때때로 잊혀지는 개념, 바로 idolatry 우상 말이다. 끝


 

번역자 리뷰어 민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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